[2] [영화리뷰_박찬욱] 헤어질 결심 (2022): 안개처럼 짙게 밴 사랑, 붕괴와 미결의 미학
박찬욱 감독_헤어질 결심 리뷰: 은유와 상징적 사랑
※ 본 리뷰는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이른 아침, 차창 밖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세상을 볼 때면 문득 이 영화의 첫 장면이 떠오릅니다. 작년 가을, 유난히 마음이 소란스럽던 날 홀로 극장을 찾아 ‘헤어질 결심’을 마주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이 날카로운 면도날로 살갗을 베는 듯한 강렬하고 선명한 자극이었다면, 이 작품은 서서히 몸을 적시는 가랑비처럼 다가와 결국 저의 모든 감정을 눅눅하게 적셔버렸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상영관 문이 열렸을 때, 저 역시 극 중 해준처럼 ‘완전히 붕괴된’ 기분을 느끼며 한동안 그 자리를 뜨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직접적인 파격이나 유혈 낭자한 묘사 없이도, 오직 서늘한 눈빛과 절제된 대사만으로 이토록 잔인하고 아름답게 심장을 파고드는 영화가 또 있을까요? 바다의 깊이를 알 수 없듯 그 속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관객인 저조차 그 안개 낀 바다 한가운데에 고립된 듯한 착각마저 듭니다. 오늘은 안개 속에 숨겨진 그 지독하고도 단아한 사랑의 기록을 차분히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 헤어질 결심의 기본 정보 및 선택 이유
영화 ‘헤어질 결심’은 2022년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으로,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깊은 심연을 가진 작품입니다. 영화의 표면적인 장르는 치밀한 수사극이지만, 그 본질은 두 남녀의 어긋난 타이밍과 지독한 갈망을 다룬 진한 ‘어른들의 멜로’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든 이유는 작품 곳곳에 안개처럼 자욱하게 숨겨진 은유와 상징의 풍부함 때문입니다.
단순히 한 번 보고 즐기는 영화를 넘어, 인물의 미세한 눈빛 떨림 하나와 대사 한 마디를 곱씹을 때마다 겹겹이 쌓인 새로운 의미가 발견되는 ‘텍스트의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변사 사건의 피의자인 서래와 담당 형사 해준이라는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극단적 위치의 두 사람이, 서로의 일상과 삶 속으로 서서히 침투해 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그 어떤 화려한 액션 영화보다 긴박하고 매혹적인 심리적 파장을 일으킵니다. 무엇보다 영화가 끝나도 가시지 않는 그 지독한 여운은 관객입장에서 다시 이 미결 사건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 ‘헤어질 결심’ 주요 관전 포인트: 안개 속에 숨겨진 사랑의 흔적
📍 ‘붕괴’와 ‘미결’: 단어에 박힌 사랑의 정의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붕괴’와 ‘미결’입니다. 해준은 서래에게 “내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당신을 잊으려 했지만, 나는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붕괴는 파멸이 아니라, 타인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경계가 무너져 내리는 사랑의 극단적인 형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서래는 해준의 사랑이 끝났을 때 자신의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녀는 해준의 기억 속에 영원히 ‘미결 사건’으로 남기 위해 바다로 향합니다. 마침표를 찍지 못한 사건은 영원히 잊히지 않듯, 서래는 스스로를 미결의 상태로 둠으로써 해준의 심장 속에 영원히 거주하기를 선택합니다. 이 어긋난 사랑의 시차는 관객의 마음속에 거대한 파도를 일으킵니다.
📍 산에서 바다로: 공간이 그려내는 감정의 전이
영화는 전반부의 ‘산’과 후반부의 ‘바다’라는 명확한 대비를 통해 인물의 심리 변화를 묘사합니다.
- 산(구소산): 수직적이고 단단한 공간입니다. 해준이 서래를 의심하고 관찰하며 정욕과 수사 사이에서 흔들리는 시작점을 상징합니다.
- 바다(이포): 수평적이고 유동적이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공간입니다. 서래의 결심이 실행되는 곳이자, 해준이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울부짖는 종착지입니다.
- 벽지와 옷의 패턴: 서래의 집 벽지가 산처럼 보이기도 하고 파도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처럼, 두 인물의 감정은 모호한 경계 위에서 끊임없이 출렁입니다.
📍 상징적 오브제: 스마트폰과 인공눈물
박찬욱 감독은 현대적인 소품들을 지극히 고전적인 방식으로 활용합니다.
- 스마트폰과 스마트워치: 언어의 장벽을 가진 서래와 해준 사이에서 번역기 어플과 녹음 파일은 그들의 진심을 전달하는 중요한 매개체입니다. 디지털 기기가 이토록 서정적으로 쓰인 사례는 드물 것입니다.
- 인공눈물: 해준이 수시로 넣는 인공눈물은 그가 세상을 똑바로 보고 싶어 하는 결벽적인 형사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서래라는 ‘안개’ 때문에 흐릿해진 자신의 시야를 억지로 교정하려는 처절한 노력을 상징합니다.
📍 ‘보는 것’과 ‘보이는 것’: 관찰자의 시선과 카메라의 위치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카메라가 놓이는 위치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죽은 사람의 눈동자 안에서 밖을 내다보거나, 스마트폰 액정 안쪽에서 인물을 바라보는 등 파격적인 시점을 사용합니다.
이는 단순히 기교를 뽐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훔쳐보는’ 해준의 직업적 특성과 사랑의 속성을 시각화한 것입니다. 해준이 망원경으로 서래를 지켜볼 때, 카메라가 서래의 바로 옆에 위치하여 마치 해준이 서래의 곁에 직접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연출은 백미입니다. 이러한 시점의 다양한 변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수사관의 차가운 시선과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뜨거운 시선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게 만들며, 영화 전반에 묘한 긴장감을 불어넣습니다.
📍 품위 있는 언어: 고전적 대사가 주는 낯선 로맨티시즘
서래는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오히려 사극이나 고전 문학에서나 나올 법한 ‘품위 있는 언어’를 구사합니다. 현대인들이 잘 쓰지 않는 “마침내”, “단일한”, “붕괴”와 같은 단어들은 해준과 서래의 대화를 지극히 고전적이고 우아한 멜로극으로 승격시킵니다.
서래의 서툰 듯 정확한 한국어는 해준의 심장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화살이 됩니다. 특히 “저 폰은 바다에 던져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라는 대사는 직설적인 사랑 고백보다 훨씬 더 강렬한 울림을 줍니다. 감독은 언어의 장벽을 오히려 사랑의 깊이를 더하는 장치로 활용하며, 관객들에게 말의 맛을 음미하는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 전 세계가 극찬한 ‘헤어질 결심’ 주요 수상 내역
이 작품은 전 세계 30개 이상의 영화제에 초청되었으며, 국내외를 막론하고 ‘올해의 영화’로 선정되었습니다. 특히 해외 평론가들 사이에서 박찬욱 감독 영화의 정점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다음과 같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 해외 주요 시상식
- 제75회 칸 영화제: 감독상(박찬욱) 수상
- 제80회 골든 글로브: 외국어영화상 노미네이트
- 제76회 영국 아카데미(BAFTA): 외국어영화상, 감독상 노미네이트
- 제28회 크리틱스 초이스: 외국어영화상 노미네이트
- 전미 비평가 위원회(NBR): 올해의 외국어 영화 TOP 5 선정
- 국내 주요 시상식 (싹쓸이 기록!)
- 제43회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박해일), 여우주연상(탕웨이), 음악상, 각본상 (주요 부문 6관왕)
- 제59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수상
- 제58회 대종상 영화제: 작품상, 남우주연상, 시나리오상 수상
- 제31회 부일영화상: 최우수작품상, 남녀주연상 등 5관왕
- 제4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 6관왕
이처럼 화려한 수상 이력은 ‘헤어질 결심’이 단순한 장르 영화를 넘어 예술적 완성도가 정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청룡영화상에서 주요 부문을 모두 석권한 것은 한국 영화계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 확장된 시선: 올드보이와 헤어질 결심의 거리
박찬욱 감독의 출세작인 ‘올드보이’와 비교하면 두 영화의 온도 차는 극명합니다.
- 올드보이가 복수를 위해 혀를 자르고 피가 튀는 ‘뜨겁고 물리적인 폭발’이라면,
- 헤어질 결심은 사랑을 위해 자신을 지우고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차갑고 심리적인 침전’입니다.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기억을 지우려 발버둥 쳤다면, ‘헤어질 결심’의 서래는 상대의 기억 속에 영원히 각인되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폭력의 미학을 다루던 거장이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고요한 감정의 파동만으로도 관객을 압도할 수 있음을 증명한 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수 십년 동안 닦아온 감독의 내공이 폭발하는 영화인 것 처럼 느껴졌습니다.
또한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을 연상시키는 서스펜스적 구조를 취하면서도, 한국적인 정서와 탕웨이만의 독보적인 분위기를 더해 완전히 새로운 장르의 영화가 탄생했습니다.
[참고: 이전 글 ‘올드보이 리뷰‘ 에서 자세히 확인하세요.]
🐚 결론: 영원히 찾지 못할 ‘미결’의 슬픔에 대하여
영화를 보고 난 뒤, 며칠 동안 정훈희의 노래 ‘안개’를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서래가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고 그 안으로 들어갔을 때, 밀물과 함께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해준의 뒷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저 역시 삶의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 영원히 잊히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어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유치한 기억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하지만 서래의 방식은 유치함이 아닌, 가장 숭고하고도 잔인한 사랑의 증명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내뱉지 않으면서, 온몸으로 사랑을 고백한 이 영화의 엔딩은 제 인생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로 남을 것입니다.
- 🎬 최종 평점: ⭐⭐⭐⭐⭐ (5.0 / 5.0)
- 📢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 단어 하나, 소품 하나에 담긴 은유를 해석하기 좋아하는 ‘N차 관람객’
- 자극적인 로맨스보다 가슴 저릿한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를 원하는 분
- 박찬욱 감독 특유의 탐미적인 영상미와 완벽한 구도를 사랑하는 분
🎬 〈올드보이·박쥐·아가씨〉
🔗 함께 읽으면 좋은 박찬욱 감독 영화 시리즈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서로 다른 장르를 취하고 있지만, 미장센과 인간의 죄의식이라는 공통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아래 세 편은 그 흐름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입니다. 각 제목을 클릭하면 리뷰글로 이동합니다.
- 🎬 올드보이
→ 복수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죄의식과 망각의 선택을 다룬 작품 - 🩸 박쥐
→ 욕망을 인식한 인간이 끝내 책임을 어떻게 감당하는지를 묻는 영화 - 🌸 아가씨
→ 반전 구조와 화려한 미장센 속에서 욕망의 구조를 전복하는 작품
세 작품을 함께 읽으면, 박찬욱 감독이 복수 → 욕망 → 해방으로 이동해온 궤적이 보다 또렷하게 보입니다.
❓ FAQ: 영화 헤어질 결심에 대해 자주 묻는 질문
📍 제목 ‘헤어질 결심’은 누가 하는 것인가요?
표면적으로는 서래가 해준과 헤어지기 위해(잊기 위해) 하는 결심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끝날 때쯤 관객은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기 위한 결심’이었음을 말이죠. 해준 역시 수많은 결심을 하지만 결국 서래라는 파도에 휩쓸리고 맙니다.
📍 서래가 해준에게 보낸 녹음 파일의 의미는?
“저 폰은 바다에 던져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라는 해준의 말은 서래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들렸습니다. 자신의 직업적 윤리를 버릴 만큼 그녀를 아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서래는 이 목소리를 반복해 들으며 자신의 사랑을 키워나갔습니다.
📍 영화 속 ‘안개’ 노래가 중요한가요?
네, 이 영화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가수 정훈희의 ‘안개’라는 곡에서 영감을 받아 이 영화를 기획했습니다. 안개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 모호함, 그 속에서 피어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영화 전체의 대기(Atmosphere)를 지배합니다.
🎬안개 속에 머물고 싶은 날,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보시길 권합니다.
👉 다음 글에는 종교와 욕망의 충돌을 다룬 박찬욱 감독의 ‘박쥐’ 리뷰를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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